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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제사에서 평가가 극단적인 인물 “김우중”은 과연 누구인가?

얼마전 뉴스에서는 한 인물의 죽음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82세의 연로한 나이의 세상을 떠났는데요, 그의 이름은 “김우중” 입니다.  

김우중,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경제계에서는 아주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현대 그룹의 “정주영” 회장, 삼성 그룹의 “이병철” 회장과 함께 3대 재벌이라는 대우그룹을 이끌던 신화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재벌인 정주영 회장, 이병철 회장과는 다르게 “결말이 실패한 기업인” 혹은 “정권의 희생양” 이라는 평가가 엇갈리는 비운의 기업인이기도 합니다.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일까요? 작은 회사인 대우실업을 재계 3위 까지 끌어올린 대한민국의 신화적인 경제인일까요? 아니면 단군이래 최대의 회계부정을 저지른 비운의 경제인일까요? 그와 더불어 대우그룹에 대하여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한 샐러리맨 출신 김우중

1936년 일제시대, 대구에서 태어난 김우중은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친인척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 취업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살린 경험으로 1967년 드디어 “대우실업”이라는 회사를 단돈 500만원을 가지고(그때 당시에 단돈 500만원은 아닌듯 하네요^^) 창업을 하게 됩니다. 

창업 초기에는 그저 그런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거 같습니다. 이미 현대, 삼성, 럭키그룹(LG의 전신)은 당시 기준으로 대기업의 반열에 올라있던 반면 “대우실업”은 별다른 이름이나 빛을 보지 못했던 작은 무역회사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청년 “김우중”은 남다른 범상한 경제인이었던 모양입니다. 주변의 경기고 인맥과 유창한 영어 실력, 특히 당시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맥(?)등에 힘입어 창업 5년만에 1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이에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게 되는데요, 불과 창업한지 10여년 만에 재계 4번째 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현대, 삼성, 럭키(LG)그룹 다음으로…) 

이야~ 엄청나군요. 최근의 IT분야 소위 잘나가는 유니콘 기업이라고 해도 김우중 전 회장의 “대우실업”에 비하면 그 성장세는 비교가 안될 지경입니다. 정말 급격히 초고속 성장을 했던 기업이었던거 같습니다. 

(주)대우의 4대 재벌 진입, 공격적 경영으로 세계화를 꿈꾸다.

초고속 성장세의 대우실업은 당시 정부인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급격히 성장해 갔습니다. 짧은 시간(10년)에 한국 재계 4위로 성장한 대우실업은 동양증권, 대한전선 가전사업부, 새한자동차 등을 인수하여 대우그룹이 태동하기에 이릅니다.  

대우그룹의 상징적인 빌딩인 “대우빌딩”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자동차, 대우건설등이 주요 계열사로 성장하였고 70년대 중둥 붐을 “대우건설”이 도맡아 함으로써 한국 경제 기적의 한 축을 담당했던 대우그룹은 김우중 회장의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 경영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성장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김우중 회장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를 보면 김우중 회장은 다른 재벌 기업들 보다 해외 사업에 좀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걸로 보입니다. 특히 대우자동차는 1980년대 중 후반부터 동유럽에 거점을 마련하고 자동차 생산기지를 구축함으로써 전 세계로 사업 확장을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우자동차는 전 세계 10대 자동차 제조사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대우차 브랜드 – 르망

이렇듯 김우중 회장의 공격적인 경영은 1990년대 들어서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요, 1996년 대우가 프랑스의 가전업체인 “톰슨 멀티미디어”를 인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https://news.joins.com/article/3342943

당시에 이 사건은 국내에서도 화제가 되었지만 프랑스 내에서는 꽤 이슈가 되었나 봅니다. 당시만 해도 “톰슨 멀티미디어”는 세계 4위의 가전회사였는데요, 이런 회사가 한국의 “대우”에게 인수가 된다고 하니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긁었던거 같습니다. 거의 성사 직전까지 가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인수가 좌절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대우의 그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우그룹은 1998년도에 41개의 계열사, 396개 현지법인, 해외 고용 인력만 15만명에 이르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해서 한국 경제의 큰 축을 담당했습니다. 김우중 회장이 만 30세에 창업한 대우그룹은 그렇게 승승 장구 하고 있었던 것이었죠. 그러나….

IMF의 직격탄 (주)대우의 해체

1997년 잘 나가던 한국 경제에 갑자기 외환위기의 쓰나미가 몰려왔습니다. 이 때 세계 경영의 신화인 김우중 회장의 대우그룹은 정부 관료들의 구조 조정 권고를 잘 이행하지 않고 마찰을 빚으면서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긴축 정책을 펴라는 정부 정책과 오히려 반대적으로 확장을 역설하고 1997년 쌍용자동차를 인수함으로써 유동성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대우그룹은 현금확보를 위해 100억 달러에 달하는 채권을 발행하였는데요, 이에 급격히 자기 자본 비율이 증가하여 무려 500%에 달해 위기를 맡게 됩니다. 이에 구조조정 자구안을 발표했지만 1999년 결국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고 대우그룹은 해체되어 그 신화를 마감하게 됩니다. 

생전의 김우중 회장

IMF의 충격파와 더불어 대우그룹의 해체는 대한민국 경제의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게 됩니다. 1999년 파산 직전의 대우의 부채는 720억 달러(현재 환율로 82조원) 정도 되었는데요, 이는 당시에 세계 최대 규모의 부채로 파산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우그룹의 해체는 수많은 계열사와 종사자의 구조조정을 유발하였고 이는 외환위기로 촉발된 한국 경제를 더욱더 위기의 쓰나미로 몰게 오게 됩니다. 대우 계열사의 부도와 알짜배기 주요 계열사인 대우자동차, 대우건설, 대우중공업 등이 해외 자본으로 값싸게 인수되거나 정부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연명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결국 샐러리맨 “김우중 회장”의 대우 신화는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지요. 

사상누각 대우 신화의 주인공 “김우중”의 파란만장한 도피사 

1980년대 김우중 전회장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를 보면 그의 성격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조직장악력으로 대우 그룹을 맨손으로 키운 참 어찌보면 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우중 전회장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모습

특히 당시 군사정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인맥으로 대우를 재계 3위까지 키워낸 것은 대단한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성과가 인맥을 적절히 활용하여 대우 그룹을 키웠다고는 하나 그의 탁월한 안목과 엄청난 일 중독, 특유의 결단적인 업무 스타일도 뒤따랐기 때문에 그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합니다.  

1980년대에 국내 다른 재벌 기업들과 달리 해외 무대에 공격적으로 진출한 것도 미래를 보는 그의 안목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동구권이 민주화 바람이 불고 있음을 직시하고 동유럽에 공장을 세우고 동남아에도 진출하는 등의 그의 혜안은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기업인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예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의 행보는 오늘날로 볼 때 기업인들이 충분히 참고할만한 행보인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대우는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1967년 창업한 대우는 30년이 갓 넘은 시점에 세계 최대 회계 부정, 세계 최대 파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맙니다. 1998년 외환위기로 국내 기업들이 휘청이고 있을때 IMF의 요구에 따라 정부는 국내 재벌 대기업들에게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주)대우의 김우중 전 회장은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고 역설합니다. 좀더 더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해외 진출을 해야 된다고 주장을 했던 것이지요.  

이에 정부 관료들과의 충돌이 빚어졌고, 김우중 전 회장의 (주)대우는 구조조정을 할 시기를 놓치게 됩니다. 사실 그때 당시에 아무리 건실한 기업이라도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는데, 김우중 전 회장은 약간 오만함을 가지고 있었던거 같습니다.  

결국 1999년 대우그룹 모든 계열사가 파산하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이에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에 돌입하게 되는데, 정부가 조사를 해보니 아주 충격적인 (주)대우의 민낯이 보여지게 됩니다.  

바로 당시 21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회계 부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샐러리맨의 신화, 포춘지에도 특필된 김우중 전 회장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해외 진출을 공격적으로 하기 위해 회계 장부를 조작을 해서 이뤄낸 (주)대우의 성과였던 것이었습니다. 

생전 전용기나 헬기를 타고 이동했던 김우중 전 회장의 모습

국내 재계 3위의 대기업 집단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런 사실에 사람들은 충격과 공포를 느끼게 되었고, 김우중 전 회장은 한국 경제의 신화적 인물에서 순식간에 나라를 뒤흔든 경제범죄자로 낙인이 찍혀버리게 됩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에 전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김우중 전 회장의 (주)대우를 모래성에 쌓은 신화라고 깍아내려지기 까지 합니다. 

1999년 12월 대우 사태가 터지고 난 다음 김우중 전 회장은 해외 도피 생활을 시작합니다. 중국을 거쳐, 베트남, 영국을 거쳐 프랑스까지… 이미 프랑스에서도 유명 인사였던 김우중 전 회장은 프랑스 임시 국적을 획득하여 프랑스에서 거주하다가 2005년 정부와 인터폴의 압박으로 인해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해외 도피를 시작한지 만 5년 만이네요. 

결국 재판정에 선 “김우중 전 회장”은 2006년에 징역 8년6월, 벌금 1천만원, 추징금이 무려 17조 9천 253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선고받게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69303.html

(주)대우의 엄청난 신화를 일궈낸 인물,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를 주창한 기업가, 세계 경영으로 (주)대우의 비상을 꿈꾸던 김우중 전 회장은 그렇게 그의 노년을 범죄자로 낙인 찍히게 됩니다. 특히 21조원의 엄청난 회계 부정을 저지른 범죄로 인해 추징금이 17조라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선고되는데요. 이런 추징금을 선고받은 사례는 김우중 전 회장이 처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김우중 전 회장은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게 됩니다. 지난 2005년 도피중 국내로 입국하면서 “그룹 경영 총괄 책임자로써 좀더 일찍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못해서 송구하다. 실패한 기업인으로 과거의 문제점들을 정리하고자 돌아오게 되었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연인 김우중은 특별 사면 후 전 대우출신 기업인들과 2010년 이후로 해외를 돌며 제 2의 김우중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청년 사업가”들을 양성하기 위해 동남아를 돌며 노력해오던 중 2019년 12월 9일 83세를 일기로 그 파란만장 했던 삶을 수원의 아주대 병원에서 마감하게 됩니다. 

엇갈린 평가와 비운의 기업인 김우중

출처 연합뉴스

83세를 일기로 그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던 기업인 김우중 전 회장은 한국 경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위치와 영향력을 지냈던 인물임에는 분명합니다. 1967년 창업하여 짧은 시간에 재계 3위까지 규모를 키웠던 대우그룹은 김우중 전 회장의 능력이 돋보였던 신화적인 사건임에는 분명합니다.  

비록 32년만에 대우그룹은 전 계열사가 워크아웃에 돌입하고 잘게 쪼개지는 비극을 맞이하지만 한국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수많은 고용인력과 공격적인 해외 진출로 인해 “대우”라는 브랜드가 전세계에 알려져서 국가 경제에 기여했다는 점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대우”라는 브랜드의 기업들이 고소란히 남아 있고 수많은 고용인력과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선박을 만드는 “대우 조선 해양”과 건설사인 “대우 건설”, 대우증권을 인수한 “미래에셋대우” 등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우그룹이 파산한지도 이제 2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대우그룹과 김우중 전 회장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습니다. “몰락한 세계 최대 회계 부정의 경제 범죄자인가 아니면 국내 재계 3위까지 만든 세계 경영의 주인공인 성공한 기업가”인가 입니다. 2006년에 징역형과 엄청난 추징금을 선고 받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김우중 전 회장의 저서인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를 두고 “세계는 넓고, 도망칠 곳은 많다…” 라던가, “세계는 넓고 훔칠 것은 많다.” 라는 말들로 비아냥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외환 위기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에 위기 상황에서 다른 대기업들이 위기를 직감하고 위기 관리를 하는 동안 유일하게 좀더 공격적인 경영을 했던 대우그룹이었는데요, 그 판단의 오판으로 대우그룹이 유동성 위기에 급격히 빠진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습니다. 당시에 전경련 회장을 했던 김우중 전 회장은 “이럴때일 수록 좀더 많은 투자를 해야 된다.” 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는 대우그룹의 위기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IMF의 권고안대로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하였지만 대우그룹은 그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었고,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위기가 더 빨리 찾아왔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러한 그룹 경영의 결정을 김우중 전 회장의 독단적인 결정이 문제라고 지적한 바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김우중 전 회장이 2014년도에 이러한 얘기를 꺼내놓습니다. “대우그룹이 방만한 경영을 해서 위기가 왔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정부의 관료들과 마찰을 빚어서 의도적으로 대우그룹이 해체가 된것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결론적으로 대우그룹은 해체가 되었고, 김우중 전 회장은 실패한 기업인이 된건 사실입니다. 그룹이 해체되고 나서 그는 나름대로 노력을 한걸로 알려져 있지만, 2019년 12월 쓸쓸하게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아직 김우중 전 회장과 대우그룹의 해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건 없습니다. 그가 20조원의 세계 최대 회계 부정을 통해 그룹을 경영했던 경제 범죄인인건 사실이고, 그로 인해 외환 위기 당시에 한국 경제가 위기에 빠졌던 것 조차 사실입니다. 어쨌거나 당시의 구조조정 여파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지만 당시의 교훈으로 인해 건실한 대기업들이 현재까지도 잘 경영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의 기업가 정신과 해외 진출을 통해 “세계 경영”을 했다는 것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청년들의 도전적 정신을 일깨워 주는 중요한 가치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대우그룹은 1999년 해체하기 직전까지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던 대기업이라는 것은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우그룹이 역사속으로 사라진게 아쉬울 뿐입니다.